나이가 들수록 사람들은 말합니다. ‘현실을 봐야지’, ‘그건 이상적인 생각이야’, ‘감정은 접어두는 게 좋을 때도 있어.’ 어릴 땐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행동하던 사람들이, 점점 계산하고 타협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그런데 여전히 우리는 가끔 설레는 감정에 기대고 싶고, 누군가를 만나서 가슴이 뛰는 경험을 다시 하고 싶어져요. 이렇게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을 중요하게 여기는 태도, 그게 어쩌면 지금도 우리 안에 남아 있는 낭만주의 아닐까요?
낭만주의는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중반까지 유럽을 중심으로 퍼진 예술·사상·문화의 흐름입니다. 당시 사회를 지배하던 흐름은 계몽주의와 고전주의였어요. 계몽주의는 이성과 과학, 합리성이 인간을 더 나은 존재로 만든다고 믿었고, 고전주의는 절제된 형태와 질서, 조화를 추구했지요. 그런데 인간은 그만큼 단순하지 않았습니다. 계산되지 않은 감정, 예측할 수 없는 내면, 설명할 수 없는 아름다움도 존재하니까요. 낭만주의는 이성 중심 질서에 대한 반발로, 감정과 상상력, 개성을 전면에 내세웠습니다.
문학에서는 고전주의가 이상적 인간형을 그리고 교훈적 내용을 중시했다면, 낭만주의는 개인의 고통과 고백을 드러냈습니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처럼 감정이 삶을 집어삼킬 수 있다는 걸 진지하게 받아들였고요. 미술에서도 고전주의가 정돈된 구도와 해석 가능한 메시지를 중시했다면, 낭만주의 화가들은 감정을 직접적으로 자극하는 자연의 위엄, 빛과 안개의 흐림, 인간의 고독한 모습 등을 그렸습니다. 대표적으로 프리드리히의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 같은 작품이 그렇죠.
음악에서는 고전주의가 구조와 형식을 중시했다면, 낭만주의는 멜로디와 화성으로 감정을 표현하려 했습니다. 쇼팽, 슈만, 리스트, 브람스 같은 작곡가들이 바로 이 흐름의 중심에 있었고요. 쇼팽의 ‘녹턴’을 듣다 보면 밤하늘 같은 고요함 속에 서늘한 애틋함이 흐릅니다. 과하지 않고, 그렇다고 담담하지만도 않은 그 감정. 말보다 음악이 더 솔직할 수 있다는 걸 느끼게 해줍니다. 음악이라는 형식 속에 감정을 담으려 했던 시도, 그것이 낭만주의의 힘이었어요.
철학에서도 이성과 합리를 신봉했던 계몽주의에 반기를 든 흐름이 낭만주의 철학입니다. 루소는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고 보았고, 쇼펜하우어나 키에르케고르는 고통, 불안, 주관적 실존 같은 감정과 내면을 철학의 중심으로 끌어올렸죠. 결국 이들은 ‘인간은 이성으로만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겁니다.
낭만주의는 단지 옛 예술사조에 머물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만나 ‘조건이 맞는다’보다 ‘이 사람이라서 다행이다’라고 느끼고 싶어지는 마음, 비 오는 날의 적막에 괜히 감정이 묘해지는 순간들, 뭔가 설명할 순 없지만 가슴이 살짝 울리는 순간들 속에 지금도 살아 있습니다.
지나치게 감정을 억누르고, 계산적으로 관계를 따지고, 시간도 생산성으로만 측정하려는 사회 속에서 우리는 어느새 감정에 민감한 삶을 잊어버린 것 같기도 해요. 그래서 가끔은 낭만주의를 떠올려야 하지 않을까요. 삶은 이성만으로 완성되지 않으니까요. 어쩌면 우리의 직관과 감정이 삶을 더 단단하게 해주는지도 모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