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본능적으로 부정적인 자극에 더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진화심리학에서는 이를 ‘부정성 편향’이라고 부르죠. 생존을 위해 위험 신호에 더 주의를 기울이도록 진화한 결과입니다. 그래서 열 명이 칭찬을 해도 한 사람의 혹평이 훨씬 더 마음에 오래 남습니다. 디지털 공간에서는 이 편향이 더 두드러집니다. 말 한마디에 기분이 오르고, 또 한마디에 무너질 수 있는 환경이니까요.
하지만 감정이 강하게 움직인다고 해서, 그 감정이 반드시 진실을 더 잘 말해주는 건 아닙니다. 누군가의 칭찬보다 누군가의 비난이 더 크게 들리는 순간, 우리는 ‘그 말이 정말 나를 잘 알고 한 말일까?’를 되묻게 됩니다. 깊이 있는 피드백과 즉흥적인 반응은 다르며, 날카로운 말보다 다정한 말이 더 정확한 조언일 때도 있습니다. 감정의 크기보다 신뢰와 맥락이 중요하다는 걸, 어른이 되면서 점점 더 실감하게 됩니다.
사회학자 찰스 쿨리는 우리가 타인의 시선을 통해 자아를 형성한다고 말했습니다. 자아는 ‘내가 생각하는 나’가 아니라, ‘타인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에 대한 내 상상 속에서 만들어진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요즘 같은 시대엔 질문을 더 세분화해야겠지요. '어떤' 타인의 시선이냐는 겁니다. ‘그 사람이 나를 얼마나 알고 있는가?’, ‘그 말은 어떤 맥락에서 나온 것인가?’ 평가 자체가 아니라, 그 평가의 출처와 무게를 다시 살펴야 하는 겁니다. 무명의 댓글과 오래 지켜봐 준 친구의 말은 분명 다릅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철학적 개념들도 살펴볼까요? 두 개의 개념으로도 충분하려나 싶지만 좋은 철학 개념이 있어 고민하다가 소개를 덧붙여요.
철학자 아렌트는 인간의 고유함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 행위하고 말할 때 드러난다고 봤습니다. 하지만 모든 타인의 말이 나를 진실하게 비추는 건 아니죠. 신뢰와 존중이 있는 관계 안에서의 평가만이 나를 더 정확히 비출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키에르케고르는 군중의 익명성과 획일적 판단에 휩쓸리는 삶은 ‘비진정성’이라고 경고했어요. 그는 진실한 삶이란 내면의 목소리와 내가 선택한 의미 있는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다고 말했습니다.
모든 시선을 다 받아들일 수 없다는 걸, 다 받아들일 필요도 없다는 걸 받아들이는 게 효과적일지도 모릅니다. 어떤 시선은 나를 찌르고, 어떤 시선은 나를 일으킵니다. 그때 내가 붙잡아야 할 건 내 마음을 응원한 사람의 말, 나를 믿고 지지해준 사람의 태도입니다. 조건 없는 응원이 결국 더 멀리 가는 힘이 된다는 걸 우리는 이미 여러 번 경험해 왔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