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채우는 나의 결핍 나의 결핍을 마주하기
누구나 힘든 시기를 지나오지요. 저 역시 그랬고, 어린 시절 마음이 무겁고 혼란스러울 때면 책을 통해 위로를 받곤 했습니다. 자연스럽게 철학을 전공하게 되었고,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은 사회를 향한 질문으로, 형이상학적 물음은 자연과 과학으로 확장되며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었습니다. 그런 시간이 지금의 감수성과 사고방식을 만들어주었다고 생각합니다.
한편으로는 안정적인 사랑도 저를 지탱해주었습니다. 일찍 세상을 떠나셨지만, 아버지의 따뜻한 애정이 저에게는 오래도록 남아 있었고, 덕분인지 다정하고 평온한 사람들과의 관계를 자연스럽게 맺을 수 있었어요. 돌아보면, 그런 이들은 대개 화목한 가정에서 자란 사람들이었고, 저 역시 그런 가정을 만들고 싶다는 바람이 컸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른 나이에 결혼을 선택했던 이유도, 어쩌면 안정감을 향한 갈망 때문이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한 가지를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타인을 통해 느끼는 안정감이 아무리 따뜻해도, 내면의 허전함을 대신 채워줄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혼 후 친정집으로 돌아왔던 어느 날, 오랜만에 걸은 동네 골목에서 예전 그대로인 풍경들을 마주하며 묘한 감정을 느꼈습니다. 달라진 것 없이 그대로인 모습이 반가우면서도, 마치 과거로 되돌아온 듯한 감각이 두려웠습니다. 결국 벗어나고자 애썼던 곳으로 다시 돌아왔다는 사실이, 제 안에 깊은 울림으로 남았습니다.
그때 결심하게 됐습니다. 더는 회피하지 않기로요. 부족했던 시절과 결핍의 기억도 제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그 시절이 있었기에 지금의 제가 있고, 도피가 아닌 사유를 선택했던 과거의 선택이 지금의 삶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을요. 부족함을 그대로 두지 않고, 그것을 새로운 의미로 바꾸는 일은 결국 제가 해야 할 몫이라는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이제는 누군가를 통해 채워지는 감정보다, 스스로 마음을 다스리고 채우는 삶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여전히 좋은 사람과 건강한 관계를 꿈꾸지만, 그 이전에 제 자신을 잘 돌보고, 그 시간들을 글로 정리해 나가고 싶습니다. 그래서 매일을 가능하면 충실하게 살아가려 합니다. 언젠가 이 글들이, 비슷한 시기를 지나고 있을 누군가에게 작게나마 닿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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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핍과 좌절이 만드는 나의 서사
결핍은 우리가 쉽게 꺼내놓기 어려운 감정이에요. 부족했던 유년기, 외롭거나 상처받았던 기억, 채워지지 않은 관계. 많은 사람들이 이런 감정을 억누르거나 무시한 채 살아갑니다. 그리고 어른이 되어서는 그 결핍을 빠르게 덮어버리려 하죠. 좋은 연애, 안정된 커리어, 칭찬과 인정 같은 외부의 보상으로요. 하지만 아무리 좋은 사람이 곁에 있어도, 스스로의 허전함을 대신 채워줄 수는 없습니다. 다행이도, 결핍은 오히려 그 자체로 우리가 스스로를 이해하고 성장하게 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어요:)
철학자 폴 리쾨르는 인간이 자신의 삶을 이해하는 방식을 ‘해석적 자아(narrative identity)’라고 설명했는데요. 우리는 ‘정해진 자아’를 발견해가는 존재가 아니라, 삶의 경험을 해석하고 이야기로 구성하면서 ‘나’를 계속 새롭게 만들어가는 존재라는 뜻이에요. 같은 상처라도, 어떻게 이야기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고, 그 의미가 곧 나를 다시 정의합니다. “그 일이 날 망쳤다”가 아니라 “그 일을 겪었기에 나는 지금 이 길을 걷고 있다”는 식으로요.
심리학자 도널드 위니컷 역시 비슷한 관점을 제시한 바 있어요. 그는 ‘완벽한 부모’가 아니라 ‘충분히 좋은 부모’가 아이의 건강한 성장을 돕는다고 말했지요. 완벽하게 채워주는 보호보다는, 아이가 결핍을 경험하되 그것을 스스로 다룰 수 있도록 지켜봐주는 환경이 중요하다는 거예요.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니, 완벽하지 않은 저에게 응원이 되어요. 작은 좌절과 결핍이 아이의 자율성과 감정조절 능력을 키우고, 결국 내면을 더 풍요롭게 만든다고 봤어요.
사회학적으로도 ‘결핍 없는 삶’을 이상으로 만드는 사회 구조가 있어요. 완벽한 연애, 이상적인 가족, 안정된 커리어 같은 서사를 따라가지 않으면 실패한 삶처럼 느껴지기도 하죠. 하지만 사실, 그런 서사는 어디까지나 평균적인 틀일 뿐, 개인의 고유한 삶을 설명해주지는 못합니다. 누구나 각자의 시간과 방식으로 삶을 구성하고, 고유한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중이니까요.
결핍은 감춰야 할 결함이 아니라, 나를 이해할 기회를 만들어주는 조각일 수 있어요. 우리가 그 감정을 바라보고, 이름 붙이고, 의미 있게 해석할 수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상처가 아니라 삶의 힘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완벽해지려 애쓰기보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고, 내가 살아낸 시간을 스스로의 언어로 이야기해보는 것. 그것이 삶을 단단하게 만드는 과정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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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함은 다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출발점
결핍은 내 삶을 꼭 망치는 건 아니에요. 돌이켜보면, 결핍이 있었기에 더 깊이 이해하고, 더 치열하게 살아내고, 더 따뜻해질 수 있었어요. 즉 결핍은 내가 도망쳐야 할 실패가 아니라, 내가 나를 해석하고 다시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출발점이 될 수 있더라구요.
오늘 하루, 나의 ‘결핍’에 대해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때요?
내게 없어서 괴로웠던 것, 그게 나에게 어떤 힘이 되었는지 생각해보는 거예요.
“나는 ______이 부족했지만, 그래서 나는 ______할 수 있었다.”
혹은, “그 결핍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의 나로 자라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비교나 원망 없이, 지금의 내가 어떻게 자라왔는지를 중심으로요.
저는 올해 결핍을 부정하지 않고, 그 결핍이 있었기에 만들어진 나의 성장을 바라보는 연습을 하고 있어요. 삶을 다시 읽는 새로운 해석이 되더라구요.
내게 없어서 슬펐던 것을 내가 자라온 방식의 일부로 조금은 따뜻하게 바라봐주세요. 저는 그러려고 하고 있어요. 삶이 완벽하지 않았고 구멍난 곳들이 있었기에, 지금 이런 글도 쓰고 구독자님이랑 연결될 수도 있고 누군가를 응원할 수도 있으니까요.
아, 혹시 결핍을 글로 승화해보고 싶으시다면, 함께 쓰고 싶으시다면, 7월의 온라인 글쓰기 모임에 함께 해요. https://dantum.kr/class/?idx=35
함께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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