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껏 실패할 수 있다는 것 마음껏 실패하겠습니다.
올해는 저에게 실패를 마음껏 허용하는 해로 보내기로 했어요. 생각해보면 원래도 그때그때 제가 하고 싶은 정도로만 하면서 살아왔던 것 같은데, ‘실패해도 괜찮아’라고 스스로 선언한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저는 꽤 안정적으로 살아온 편이었거든요. 의사와 고위 공무원이었던 부모님 아래에서 응원을 받으며 자랐지만, 동시에 무척 보수적인 기대 속에 있었고, 어릴 적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소천과 사기로 인한 정서적, 경제적 충격은 제 안에 ‘안정’에 대한 집착 같은 걸 만들어냈어요. 그래서 교사가 된 것도 있었죠. 안정적인 삶을 선택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교사의 삶은 제 성향과 잘 맞지 않았고, 그만두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제가 다른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거든요.
그 시기에 저를 도와준 기억들이 있어요. 과거의 시아버님이 그중 하나예요. 제가 운전면허 시험에서 두 번 떨어졌을 때, 아버님은 빙그레 웃으시며 이렇게 말하셨어요. “그럼 여덟 번 남았네.” 뭐든 열 번은 실패할 수 있다는 말이었고, 그 순간 깨달았어요. 왜 나는 한 번에 안 되면 실패자라고 생각하고 있었을까. 결국 세 번째에 붙었어요.
또 하나는 제가 키우던 강아지였는데, 거실에 선이 하나 있었거든요. 충분히 넘을 수 있는데 무서워서 울기만 했어요. 그걸 보면서 알게 됐어요. 자기가 할 수 없다고 믿는 마음이 스스로를 막고 있었던 거죠. 그 선은 실제보다 마음속에서 더 높았던 거예요.
그리고 그 시기에는 혼자 전시회를 많이 보러 다녔는데, 어느 순간 내가 나를 너무 ‘기능적인 존재’로만 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어떤 쓰임이 있는 객체가 아니라, 그냥 ‘심미적인 주체’로 살아도 되는 거구나 싶었죠.
그래서 올해, 주체로 살기로 했어요. 실패해도 괜찮다고 말하면서, 무언가에 반드시 합격해야 한다는 압박 없이, 무언가가 되어야 한다는 조건 없이 이것저것 해보는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가끔은 생각해요. 이렇게 실패만 하다가 되는 게 하나도 없으면 어떡하지? 그럼 다시 교사를 하든, 회사를 가든, 방법은 있겠지. 하지만 지금의 실패들이 모이고 쌓이면, 그 위에서 또 다른 길이 보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불안하기도 하고, 동시에 꽤 재밌어요.
스스로에게 실패를 허용하며 살고 계신가요? 우리 사회는 실패에 참 야박하잖아요. 누가 조금이라도 기준에 못 미치면 욕하지 못해서 안달이고, 실패를 비웃고, 탈락을 조롱하죠. 그래서 적어도 저는 나 자신에게 너그러워지고 싶어요. 실패해도 괜찮다고, 한 번쯤 멈춰도 된다고, 지금은 실패하는 시간이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필요하니까요. 올해, 제가 먼저 해보려고 해요. 저의 실패를 지켜봐주고, 응원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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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이렇게 실패에 야박할까?
우리 사회는 실패에 너그럽지 않아요. 실패를 해도 된다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는 실패한 사람을 조용히 밀어내거나, 흠결로 취급하거나, '그럴 줄 알았다'는 냉소 속에 두곤 하죠. 성공담은 화려하게 회자되지만, 실패담은 위로조차 없이 조용히 퇴장시키는 분위기예요. 그래서 우리는 ‘실패를 감당한다’는 말 자체가 어딘가 특별한 용기처럼 들리는 시대를 살고 있어요.
근대 이후의 자본주의 사회는 인간을 점점 더 생산성과 효율성의 관점에서 바라보도록 만들었어요. 철학자 한병철은 현대 사회를 ‘성과 사회’라고 불렀는데, 그 안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증명해야 하고, 잠깐의 실패조차 곧 자기 책임이라는 낙인이 되기 쉬워요. 이런 구조 안에서는 시도보다는 결과가 중요해지고, 과정은 축소되며, 실패는 성장의 일부가 아니라 낙오의 증거처럼 인식되죠. 경쟁을 기본값으로 삼는 사회는 실패를 개인의 성찰이 아닌 시스템의 배제 수단으로 만들어버려요.
하지만 인문학은 늘 말해왔어요. 실패야말로 인간다움의 증거라고요. 철학자 시몬 베유는 “진정한 사유는 실패 앞에서 시작된다”고 했고, 하이데거는 인간 존재 자체를 ‘불완전한 가능성의 연속’이라고 보았어요. 실패는 방향이 틀렸다는 증거가 아니라, 내가 방향을 고민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해요. 실패한다는 건 내가 무언가를 시도하고 있다는 뜻이고, 그 실패가 없으면 방향도, 성장도, 의미도 생기지 않죠.
그러니까 결국 중요한 건 실패하지 않는 삶이 아니라, 실패해도 나를 존중할 수 있는 태도예요. 나 자신이라도 내 실패에 너그러워지지 않으면, 아무도 내 삶을 온전히 받아들여주지 않아요. 실패를 허용한다는 건 결국, 나에게 존재의 공간을 허락한다는 뜻이기도 해요. 멈춤과 불확실함까지 포함해서, 나를 하나의 삶으로 인정하는 태도. 그게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용기일지도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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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작은 실천
오늘 하루, 내가 최근에 겪은 실패 또는 실패처럼 느껴졌던 일을 하나 떠올려보세요. 결과가 좋지 않아서, 누군가의 기준에 맞지 않아서, 혹은 내 기대에 도달하지 않아서 ‘실패’라고 부른 그 일 말이에요. 그리고 그 일을 향해 지금까지 해오던 말과는 조금 다른 언어를 건네보는 거예요. “이건 실패야”라는 단호한 판단 대신, “이건 내가 해본 거야”, “그때의 나는 그만큼 할 수 있었어”, “이 경험은 나에게 어떤 방향을 보여주고 있는 걸까?” 같은 문장으로 말이에요.
실패를 바꿔보려 하지 말고, 실패에 붙이는 언어를 바꿔보는 거예요. 누구도 실패에서 완벽하게 자유로울 수는 없어요. 중요한 건 실패가 나를 규정하지 않도록, 내가 내 감정을 조금 더 다정하게 이끌어주는 일이에요. 그걸 타인이 대신해줄 수는 없고, 결국은 나 자신만이 나에게 허락해줄 수 있는 일이에요.
오늘은 그걸 해보는 하루였으면 해요. 무언가 되지 않은 일에 스스로를 몰아세우기보다, 그 시도 자체에 의미를 붙이고, 그 과정 속에 남은 나의 감정에 귀를 기울여보는 시간. 실패하지 않으려는 사람이 아니라, 실패해도 나를 존중할 줄 아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연습. 올해, 저도 그 연습을 하고 있어요. 구독자님도 실패에 조금 너그러워지는 오늘이 되기를 바라요.
마음껏 실패 중인
래나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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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래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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