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서사의 동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는 현대 자아를 "반성적 자아(reflexive self)"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는 고정된 본질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삶을 끊임없이 되짚고 해석하며, 이야기 속에서 ‘나’를 만들어가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삶을 하나의 이야기, 서사로 구성하려는 충동이 자아 정체성의 핵심이라는 거죠.
그리고 그 서사에서 가장 강렬한 재료는 종종 ‘상실’에서 비롯됩니다.
사랑했던 사람과의 관계가 끝났을 때, 나를 지지하던 것과 떨어졌을 때, 우리는 흔히 무너졌다고 표현합니다. 한편으론 무너졌다는 감정 속에서 삶을 다시 써야 하는 시점이 온 것입니다. 그동안 당연하게 여겨졌던 정체성, 역할, 풍경, 말투 같은 것들을 더 이상 붙들 수 없게 되었을 때, 우린 질문을 시작하게 됩니다. ‘나는 누구인가’, ‘지금의 나는 어디쯤인가’,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은가’. 이 질문들이 바로 서사의 출발점입니다.
상처가 나를 만들기도 합니다. 물론 모든 상처가 좋은 결과를 낳는다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그 상처를 언어로 붙들고, 나의 이야기 속에서 어떤 자리에 둘 것인가는 나의 선택입니다.
이혼 이후 친정 동네로 돌아왔을 때 느꼈던 정지된 시간, 바뀌지 않은 풍경 속의 낯섦, 그것이 과거로의 회귀가 되지 않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과거가 아닌 전환점, 반환점, 30대의변곡점으로 만들기 위해서요. 이렇게 하면 상실은 한 편의 이야기를 끝내고 다음 장으로 넘어가는 움직임이 될 수도 있겠죠.
상실이 있다는 건, 그 전에 만남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상실은 회복을 가능하게 하고, 성장을 이끄는 출발점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인간적인 경험을 하고 있다는 강력한 증거이기도 하죠. 누군가를 만나고, 사랑하고, 잃고, 다시 시작하는 일련의 감정은 인간으로서 우리가 삶을 깊이 있게 살아가고 있다는 표식이죠.
상실이 있다는 건, 새로운 만남도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빈자리를 통해 우리는 다시 누군가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언젠가 또 다른 누군가와 또 다른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