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을 좋아하세요? 여름을 좋아하세요
요즘 새로운 사람들을 몇 뵈었습니다. 아니, 스쳤다고 하는 게 더 적당할 것 같습니다. 스침이 될지 인연이 될지는 모르는 시점에서 으레 들어오는 질문에는 어떤 계절을 좋아하냐는 질문이 있습니다. 봄과 가을은 마땅히 사랑스러우니 여름과 겨울 중 하나를 고르게 합니다. 사실은 덜 싫어하는 계절을 묻는 질문, 차악을 선택하는 질문인 것 같기도 합니다.
저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정말로 다 좋아합니다. 하지만 여름과 겨울 중에 하나를 고르라면 여름에 더 마음이 가요. 여름에는 제 생일이 있고, 그리하여 저를 어여뻐해주는 사람들의 마음을 느낄 수 있고, 오늘의 선선함이 시작됨을 알리는 왠지 들뜨는 여름빛의 노을이 있고, 걷기 좋게 살랑이는 여름밤의 바람이 있습니다. 술을 잘 마시지 않지만 여름밤바람이 기분을 산뜻하게 만드는 힘은 너무도 강력하여 꼭 테라스에 앉아 좋아하는 사람들과 맥주 한잔을 마시고 싶게 합니다. 편의점 앞 삐그덕거리는 투박한 플라스틱 의자 위는 선명하게 즐거운 시간이 됩니다.
앞으로 몇번의 여름을 살게될까요. 백번은 커녕 오십번이라도 건강하게 여름을 즐길 수 있다면 다행입니다. 예고없이 삶이 끝나는 걸 어릴 적에 경험한 건 제게 깊은 영향을 주었고, 저는 팔십살까지만 부디 건강하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고 생각하며 삽니다. 앞으로 약 오십번의 여름이 남았다고 생각하면 이 여름이 어떻게 애틋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여름에 단 한번의 수박을 먹는다면 앞으로의 수박도 오십번밖에 남지가 않았습니다. 그러니 한 번의 수박도 놓치진 않아야겠습니다. 저는 그런 마음으로 온갖 즐거움을 놓치지 않고 마음 담아 즐기고, 만끽하고, 행복해합니다.
여름과 겨울 중 견딜만한 걸 물어보는 질문 말고, 이런 질문은 어떨까요? 내가 오늘 맞이하는 여름에서 내가 사랑하는 건 무엇인지 말이에요. 우리는 분명 순간순간 작은 만족들을 감각하고 있는데, 인지하지 못하고 흘려보내곤 해요. 저는 이 감각들을 더 만끽하고 싶어요. 글로 적으면 감각은 더 오래 남게 되어 적고자 합니다.
제가 여름에서 가장 사랑하는 건 여름밤의 선선한 날씨인데,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여름엔 그 밤을 즐길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요. 질리지 않는 행복입니다. 요즘엔 8시에 나가서 10시까지 혼자 2시간을 걷는답니다.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면서요. 확실하게 두시간이나 행복할 수 있는 기회가 매일 있다뇨. 여름만의 기쁨입니다.
비 오는 것도 좋아합니다. 장대비가 오는 날엔 실내에서 그 비를 감상하면 그 소리가 꽤 아늑하고 아름답습니다. 어제 오늘처럼 부슬비가 흩어지는 날엔, 그 다음날 아침의 갠 하늘과 촉촉한 공기가 상쾌합니다.
수박을 적으려다가 잠시 멈췄습니다. 방금의 문장 사이에 잠깐의 회상이 있었습니다. 수박 자체에도 달콤함이 있지만 수박을 먹는 상황에 즐거움이 컸던 것이었구나를 문득 깨달았습니다. 수박은 혼자 먹기 어려운 과일이죠. 힘이 센 사람이 수박을 잘라줘야 하고, 힘이 세면서 다정한 사람이 씨를 발라주고, 다른 좋아하는 과일들을 넣고 시원한 사이다를 콸콸 부어 둘 이상이 먹곤 했죠. 안락함과 다정함을 모두 느끼던 수박 화채, 저는 그 감각을 좋아했다는 걸 글을 쓰며 방금 깨달았어요. 나보다 힘이 세고 다정하며 식탁을 공유하는 사람, 어린 날 나의 부모거나 배우자였던 사람이네요. 그러고보니 엄마와 화채를 먹은지가 아주 오래됐습니다. 엄마랑 동생에게 이번 여름 수박 화채를 같이 먹자고 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더 즐거운 마음으로 화채를 먹을 낯설고 안락한 사람이 생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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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감각의 계절
철학자 메를로퐁티는 인간이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은 ‘머리’보다 ‘몸’에 가깝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논리로 세상을 이해하기보다, 감각으로 세계를 살아내며 인식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름은, 살아 있다는 느낌이 더 선명하게 드러나는 계절일지도 몰라요. 땀이 흐르는 촉감, 모기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집중, 뜨거운 햇빛을 피해 그늘을 찾는 민감함, 아이스크림을 입에 넣을 때 퍼지는 단맛. 모든 감각이 선명하게 깨어나는 시간이죠.
그런 감각이야말로, 존재의 증거입니다. 여름밤의 바람이 좋아서 밖으로 나가고 싶고, 수박 한입이 온몸을 시원하게 만들고, 비 오는 소리를 배경으로 앉아 있으면 마음이 가라앉는 것. 그건 단순한 날씨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가 이 여름이라는 시간 안에서 ‘살아 있다’는 실감이기도 해요.
계절을 사랑한다는 건 단순히 날씨를 좋아하는 걸 넘어, 내가 내 삶을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를 자각하는 일입니다. 내게 남은 여름이 몇 번일까를 생각하며 수박 한입, 산책 한 번을 더 애틋하게 여길 수 있다는 것. 감각은 순간이지만, 그런 순간을 알아차리는 마음은 삶 전체의 밀도를 바꿔줍니다.
그러니까 여름밤의 기쁨, 수박 화채의 기억, 비 오는 날의 고요함은 그냥 감상이 아니라, 존재를 확인하는 방식이에요. 이 여름의 감각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은 마음, 그게 곧 ‘살고 있다’는 말의 다른 표현일지도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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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감각을 기록하기
이번 여름에는, 한 번쯤 이런 시도를 해보면 어떨까요.
하루에 하나씩, 감각을 기록하는 일이요. 오늘 입에 맴돌았던 맛, 창밖으로 스친 냄새, 어딘가에서 흘러나온 노래, 혹은 어떤 말 한마디가 내 기분을 바꾸었던 순간. 구체적이고 사소한 감각을 하루에 하나만 적어보는 거예요. 메모장에 한 줄이면 충분합니다.
글을 쓰지 않더라도, 감각을 인식하고 언어화하는 습관은 일상을 다르게 보게 만듭니다. 우리는 세계를 느끼며 살아내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 작은 감각들이 쌓이면 하루는 더 또렷해지고, 삶은 조금 더 나에게 가까워집니다.
특별한 이벤트 없이도 의미 있는 여름이 될 수 있어요. 그건 결국, 우리가 얼마나 우리의 삶을 느끼며 살아내고 있는지에 달려 있으니까요.
이번 주에는 그런 감각을 하나씩 적어보며 여름을 함께 살아내봐요.
아, 독자님들. 메일은 모두 소중하게 읽고 있어요. 천천히 답장 드릴게요. 감사해요 :)
선풍기의 선선한 웅웅거림을 느끼며,
래나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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