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저는 제 소득에 비해 너무 고상한 아비투스를 지니고 있어 피곤하다고 느낍니다. 소득이 적은 것은 제 탓이지만, 고상한 아비투스는 부모님의 덕분입니다.
어릴 적, 부모님은 대부분의 부모님들처럼 저에게 최선을 다해주셨습니다. 의사이신 어머니는 경제적으로 가장 좋은 것을 해주시려 했고, 공무원이셨던 아버지는 제가 원하는 것을 마음껏 하도록 심리적으로 지지해주셨습니다. 순우리말인 제 이름은 ‘날개’라는 뜻인데요, 착하게 살라는 것도, 조화롭게 살라는 것도 아닌,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며 살라는 의미로 아버지께서 지어주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저에게 바란 것은 단 하나, 저의 날개를 펼치라는 것이었습니다.
한동안 저는 그 말이 모든 부모님이 자식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이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참아라’, ‘순응해라’, ‘눈치 봐라’, ‘조화를 이루어라’ 같은 말들이 더 흔하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습니다. 저에게는 ‘참지 말고, 하고 싶은 대로 살아라’라고 말해주신 아버지가 계셨습니다. 어머니는 조금 달랐습니다. 아버지 소천 후부터 가장이 되어 너무 많은 고생을 한 어머니는, 조금 참되 사랑받으며 사는 것이 여자가 더 행복해지는 방법이라고 믿으셨기 때문입니다.
두 분 모두 서툰 부분은 있었지만, 각자의 방식으로 최선을 다해 사랑해주셨습니다. 저는 무언가를 갖고 싶다고 생각하기도 전에 갖게 되었고, 하고 싶다고 느끼기도 전에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해외여행, 박물관과 전시, 음악, 미술, 체육, 질 높은 체험학습까지, 다양한 경험을 접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집에 상주하는 가정부 아주머니가 계셨고 운전해주시는 기사님이 계셨습니다. 부모님이 일하는 동안에도 저는 많은 걸 즐기고 접했고 덕분에 저의 감각은 자연스럽게 길러졌고, 어느새 부모님보다 더 까다로워졌습니다. 웃긴 것은 정작 저는 제 손으로 큰돈을 벌어본 적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건 가끔 스스로를 확실하게 자조하는 점이 되기도 합니다.
어머니는 커피 한 잔을 내릴 때조차 잔을 데우고, 첫 물은 버리고 다시 우릴 정도로 까다로우셨습니다. 그러한 어머니의 취향은 저에게 고스란히 스며들었습니다. 동시에 저는 무엇을 해도 어머니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감각도 함께 익히게 되었습니다. 제가 스테이크를 사드려도 “OOO 호텔이 더 맛있다”라고 말씀하시는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점점 어머니를 만족시키는 걸 포기하게 되었고, 그렇게 어머니를 실망시키는 딸이 되어갔습니다. 이 이야기는 언젠가 다시 꺼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릴 적 저는 물욕도 결핍도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어머니는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과자를 쥐고 먹던 너에게 나도 하나 달라고 하면 양손에 있던 두 개를 모두 내어주던 아이였다”고요. 어릴 땐 제가 참 착했구나 생각했지만, 지금은 아깝지 않았던 것이겠구나 싶습니다. 과자는 언제든 다시 생겼을 테니까요. 김영하 작가가 말한 ‘도덕적 운’을 갖춘 사람이었달까요. 저는 베풀 수 있는 조건에서 자란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자란 저는 자연스럽게 인문학을 즐기고 글을 쓰는 고상한 아비투스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제 저는 더 이상 부유하지 않는데도요.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셨으며, 가족은 경제적 사기를 겪었습니다. 저는 그 모든 과정에서 정서적으로, 경제적으로 많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어머니는 바쁘셨고, 저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어른이기를 바라셨고, 그러지 못하면 저를 찔렀습니다. 우리 삼 남매는 모두 어머니에게 돈과 남자보다 덜 중요한 존재라고 느끼기도 했습니다. 그 시절은 균열을 남겼고, 대충 봉합된 감정 위에서 지금의 제가 존재합니다.
이후 저는 내면의 정서를 안정시키는 데 많은 에너지를 쏟게 되었습니다. 돈보다는 마음, 성공보다는 화목한 가정을 원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좋은 글을 읽고, 좋은 글을 쓰는 것이 저를 회복시키는 방식이 되었습니다.
철학은 오래도록 부유한 자들의 사유 유희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제 부유하지 않습니다. 돈은 있다가도 사라지지만, 취향과 사고방식은 쉽게 바뀌지 않았습니다. 대학생 시절 저는 ‘경제적으로 여유로워지면 철학을 다시 공부하자’고 생각했지만, 그런 시점은 오지 않았습니다. 결국 저는 돈이 없어도 글을 읽고 쓰는 삶을 택했습니다. 돈은 많지 않지만, 저는 제 방식대로 성실하게 살아왔기에 자기확신과 회복탄력성이라는 자산을 쌓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산이 있었기에 불안한 선택도 가능했습니다.
다시 생각해보면, 그 자기확신 역시 부모님이 남겨주신 선물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특히 아버지의 말, “하고 싶은 걸 다 해보며 살아라”는 기도 같은 말이요. 그 말은 영원히 제 이름으로 남아있지요. 저는 제 이름을 참 좋아합니다. 제가 지금 글을 쓰며 살아가는 이유 중 하나는, 그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일지도 모릅니다.
이제 아버지는 존재가 아니라 부재로서 저에게 영향을 주십니다. 저는 그를 잘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확실한 건, 그가 어떤 식으로든 제 삶과 선택, 그리고 글에 여전히 영향을 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도 글을 씁니다. 부유하지 않으면서도 인문학을 하고, 글을 쓰고 싶다는, 어쩌면 모순적인 이 욕망을 안고서요. 고상한 아비투스와 불안정한 현실 사이에서, 제가 할 수 있는 것을 묵묵히 지속해보려 합니다.